예술을 하는 분들이
이 시대를 참 보석처럼
빛나게 하는 것을 믿어왔다.
그렇게 살던 중에
알게 된 것이
그분들의 예술이 얼마나 아픔과 슬픔을 내재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접하면서
나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다.
또한 그 예술이 이 시대를 관통하기엔
이 시대가 너무 노후되고 단단하게 뚫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제 이시대는 모든 개천에서
전설처럼 전해져 오던
그 용들은
다 부촌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더라 하는 또 다른 전설을 듣게 되었다.
가진 자는 그 개천을 콘크리트로 메꿔서
콘크리트를 쳐버렸고
용이 난다던 개천은 이제
공영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판타지를 꿈꾸는 세상에
판타지가 콘크리트에 말라붙어 버린 세상이랄까.
예술가는 꿈을 꾸어야 그 품 안에서
보석이 나온다.
이건 내 생각인지 나랑 같이 생각하는 누군가가 있는지
그와는 별게로
나는 나의 글을 제시하겠다.
오늘날 그 개천은 이렇게 주차장이 되었고
용이 날 만한 그 어디도 찾기가 힘들어진 지금의 세상에
작가들은 그래도 비상하는 용까지는 아니라도
꿈틀대는 지렁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
공통의 시각이고 의견인 것 같다.
지렁이 같은 인생을 나약한고 슬프게 살아야만 하는
예술가 선생님들
관에서 배급을 준다고 하니 그마저도
못 타 먹는 분들이 대다수라
나약한 지렁이지만
끝까지 꿈틀대어서
줄을 대어 보고 정성을 들여
살아남아야 이긴다는 생존 정신을
자신이 남기는 보석이어야 하는 작품에
투영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
그 지렁이 선생님들의 작품은 예술이라고 부르기엔
좀 그렇고 아니라고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냥 아니다 라고 평가받는지 모르겠다.
작금의 시대는
졸부들이 붙인 금딱지를 보석으로 분류하는 시대이니
예술가의 산통으로 낳은 보석은
평생 그 금딱지를 붙이지 못한다면
이생에선 한 번의
빛도 보지 못하고 태어나자
매장되어 묻히고 만다.
나는 최소한 그런 꿈틀대는 예술가 선생님들을
응원한다고 말하고 싶다.
아직까지 여태
타협하지 않고 가난하기를 결심한
보석을 품은 지렁이작가 선생님!
알아만 주면 그들은 계속 굶을 것이고
그러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름진 복부지방이 줄어들지 않고 금딱지라는
기득권을 가지고 기만과 농락을 평생 일삼던
가진 자들의 따까리 선생님
그들은 보석을 낳는 그 지렁이 선생님들한테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들의 목뼈는 석회화되어갔고
그들의 허리지방은 오겹살의 그것보다 더 풍성해져 갔다.
높으신 가진 분들은
그들 마음대로 마치 양계장에서 닭이 계란을
낳듯이 지렁이 선생님들이 품은 보석을 빼앗기 위해
그 지렁이 선생님들의 작품이 유작이 되기를 기다린다는 무서운 불문율이 흉흉하게
떠돌고 있는 시대이다.
아무도 그들을 돕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생존 여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오늘도 모오스 부호를 때리듯
몇 안 되는 살아있는 지렁이 선생님들께
교신을 청하는 바이다.
끝까지 버티면 죽음이 기다린다고
그래도 버틸 거라면
지렁이 선생님은 보석을 가질 자격이 있는 거라고
모든 소유를 팔아 서라도
그들과 함께하는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아직도 내 영혼 속에는 수술 후 빼내지 못한 가느다란 바늘 같은
이물감이 극도로 나를 괴롭힌다.
그 고통이 나의 생존의 모오스 부호인 것이다.
지렁이 샘 나와라 오우버....
여기는 지렁이 본부닷....
지렁이는 지렁이로서 역할을 하며 그 존재감에 익숙해질 것이다.
비록 그길이 지렁이로 석회화 되어버린다 할지라도 그들이 품은 보석들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지렁이로서 용으로의 변신을 꿈꾸는 작가님들이
계시다면 그분들은 그분들의 길을 찾아 가면 된다.
지렁이는 지렁이지 용이 아니다.
지렁이만의 아름다움을 포용하며 인정하고 그테두리안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을 마다하지 않는 작가님들께
응원의 메세지를 격하게 보낸다.